지난 1일부터 대규모 할인 이벤트인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본격 시작됐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영국의 박싱데이를 모방한 한국형 쇼핑 할인 이벤트다. 5개 백화점에선 추석 연휴 전날인 25일부터 할인을 진행해왔고 대형 마트와 편의점, 오픈 마켓, 전통 시장 등이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할인 행사에 참여한다.
이번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내가 특별히 살 만한게 있을까? 글쓴이는 지난 주말 동안 백화점과 대형 마트, 할인점을 빙빙 돌아봤다.
■ 형식적인 '최대 50~70 % 할인'

▲ 가격이 얼마라는 걸까? 내 눈엔 50 % 할인 밖에 안 보인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최대 50~70 % 할인'이란 문구로 뻔한 미끼를 던졌다.
이 말은 판매 중인 1백 개의 제품 중 한 개만 50 % 이상 할인해도 위와 같은 문구를 붙일 수 있다는 의미다. 최대 50~70 % 할인이란 뻔한 미끼에 혹해서 들어온 소비자들은 예상보다 적은 할인율에 실망해 헛걸음하게 된다. 아주 일부 제품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전부 다 할인한다는 게 절대 아니다.
25일부터 할인을 진행한 일부 백화점에선 '죄인이 된 기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백화점은 미국처럼 제품을 직접 매입하는 유통 체계가 아니라 판매할 자리를 빌려주는 임대 매장이라서 이같은 할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백화점 차원에서 보다 많은 브랜드가 참여한다해도 소비자가 체감하는 할인율은 10~20 %, 많아야 30 % 내외 수준에 그친다. 롯데백화점은 유효 기간이 한 달에 불과한 10~20 % 할인 쿠폰 증정, 현대백화점은 딱 100명의 고객에 한정된 구매 금액 환급 이벤트, 신세계백화점은 아웃도어 할인율이 10 % 인상이 끝이다. 대상 품목도 패션 잡화로 제한돼 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를 비롯한 대형 마트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대형 마트에서 판매 중인 가전 제품의 가격을 오픈 마켓에서 검색하면 더 저렴한 경우가 많다. 쥐꼬리만한 할인율로 파격 할인했다고 과대 포장하는 제품도 있었다. GS25, 세븐일레븐 등 주요 편의점, 옥션과 11번가 등 오픈 마켓서 하는 쿠폰 증정 이벤트도 큰 의미가 없다.
최대 50~70 % 할인되는 제품은 정말 보기 힘들다. 있다고 해도 구매력이 떨어진 제품들이 태반이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와 관계 없이 이만한 할인이 지속될 제품들도 두루 보였다.
■ '블랙프라이데이'를 찾을 수 없는 한국 매장

▲ 그 어디에도 블랙프라이데이 문구는 찾을 수 없었다. 직원도 모른다.
미국은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이 되면 월마트나 아마존을 비롯한 유명 온라인 쇼핑몰에 블랙프라이데이 입간판이 일제히 걸린다. 이미 연례적 행사로 진행된지 오래돼, 쇼핑몰 별로 블랙프라이데이 카운트다운 이벤트가 진행되거나 특정 기간엔 할인에 할인을 더한 특별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이상하다. 이번 블랙프라이데이에 참여하는 매장이 분명한데, 안으로 들어가면 블랙프라이데이라는 문구를 찾기 어렵다. 이마트의 경우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대신 '이마트 코리아 그랜드 세일'로 표시돼 있었다.
매장 일부 직원들도 그저 특별 할인 행사라고만 하지,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로 할인된 상품이라 설명하진 않았다. 심지어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뭔지 잘 몰랐던 직원도 있었다.
매장 입구에 걸린 전단지도 훑어봤다. 마찬가지로 그랜드 세일로 표기돼 있는데다 주의 깊게 봐야 할 내용이 전혀 없었다. 동네 마트에서 볼 법한 할인 상품 안내 정보지였다. 마트에 입점된 일부 점포에선 30분 동안 한정 세일하는 이벤트도 있었지만, 구매력이 떨어지는 물건들이라 흥미가 없었다.
마트를 누비던 고객들도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라면서 살 게 없네, 에이 실망이다"라며 푸념했다. 마트 안은 지난 주말처럼 평화로웠다. 미국처럼 뜀박질하며 제품을 노릴 이유가 없었다.
■ 미국은 '가격 미리 공개', 한국은 '숨은 가격 찾기'

▲ 5만 원 이상 사야 상품권 3천 원을 준다. 안 사고 말겠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내가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쉽게 정할 수 있다.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가격이 사전에 공개돼 있기 때문이다. 제품 별로 할인율을 미리 비교하고 구매력을 따져 판단할 수 있어 내가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금방 결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블랙프라이데이는 그 반대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되고 나서야 할인 품목과 가격이 깜짝 공개된다. 구매력이 높은 제품은 소비자의 예상을 빗나가고, 그렇지 않은 제품들이 할인 품목에 꼬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조카뻘 어린이들이 사 달라는 장난감 가격은 기가 찬다. 5만 원 이상은 3천 원, 10만 원 이상 구매하면 5천 원짜리 상품권을 주는 게 전부다. 할인 중인 제품의 가격도 분명하게 써 놓지 않아서 가까이 가지 않으면 모른다. 의류도 가격도 태그 뒷면을 직접 살펴봐야만 알 수 있다.
수 십만 원에서 수 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전 제품들은 구매 혜택이 무엇인지 정확치 않다. LG전자 그랜드 세일의 경우 LG TV 최대 400만 원 혜택, LG 디오스 50주년 기념 사은품 증정, LG 트롬 모바일 상품권 증정 등 판매 조건 및 혜택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 이마트에서 7만 원 이상 결제하면 주는 사은품이다. 3천 원도 안 되는 팝콘이.
더욱 놀라운 것은 구매 가격에 따른 사은품이다. 글쓴이는 이날 가을철 의류 등 필요한 것이 있어 10만 원 어치를 샀는데 주는 사은품이 고작 3천 원도 안 되는 팝콘 한 봉지였다. 물어 보니 7만 원 이상 사면 주는 사은품이란다. 차라리 10 % 할인 쿠폰을 주지.
■ 미국은 제조 업체, 한국은 유통 업체가 주도

▲ 이마트나 홈플러스 가전 매장은 텅 비었다. 삼성전자 및 LG전자 직영 매장은 썰렁했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미국에 비하면 살 것도 없고 할인율도 짜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할인 행사의 주체가 달라서 그렇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엔 제조 업체가 활발하게 참여한다. 제조 업체는 상품의 공급 가격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윤보다 차기 상품을 위한 재원 확보가 중요하다면 구매력이 높은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는 전략이 가장 좋다. 유통 업체는 제조 업체가 공급하는 상품 가격에 원하는 이윤을 붙여 팔기만 하면 된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그렇지 않았다. 제조 업체가 아닌 유통 업체가 중심 역할을 했다. 제조 업체가 공급하는 상품 가격이 비슷하다보니 유통 업체들이 제 살을 깎는데 한계가 클 수 밖에 없다. 유통 업체는 제조 업체의 상품을 팔아주는 유통 마진으로 먹고 살아간다. 제조 업체가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유통 업체는 제조 업체의 협조 없이는 가격을 유연하게 조정하기 어렵다.
전 품목을 대상으로 할인되는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달리,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의류와 잡화에 집중됐다. 구매력이 높은 생활 가전을 비롯한 품목은 할인된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 정기 할인, 기획 상품은 작년에도 했던 것

▲ 정기 세일은 원래 백화점에서도 대형 마트도 예전부터 하던 것들이다.
지난 30일,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자부')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와 관련한 보도자료를 올렸다. 그 중에 눈에 띈 내용은 기존 할인 행사를 정부가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에 관한 입장 표명이었다. 산자부가 정리한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백화점과 대형 마트, 제조 업체, 프랜차이즈, 영화관, 놀이 공원, 전통 시장 등 많은 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백화점들은 매년 10월마다 정기 할인 행사를 추진하고 있었으나, 이번 행사는 범국가적 내수 진작 노력에 부응해 예년보다 5~10 % 이상 추가 할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글쓴이가 본 정부의 답변은 뻔하고 형식적이다. 한 번에 여러 업종을 열거한 점, 백화점의 정기 할인 행사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 어떻게든 정부가 참여를 유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식으로 정리됐다. 정기 할인 행사는 신년맞이 알뜰 행사, 경품 행사 등 예년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행돼 왔다.
대형 마트에서 진행하는 원플러스원, 신용카드 특별 할인, PB 상품 할인 등의 각종 행사도 예전부터 주기적으로 하던 것들이다. 편의점들도 특정 제품을 사면 증정품을 제공하거나 원플러스원, 투플러스원을 적용해왔고, 오픈 마켓도 시간을 한정해 할인 쿠폰을 제공하거나 하루에 한 개씩 초특가 상품을 한정 판매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특별히 정부 기관이 유통 업계를 상대로 참여 유도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원래 하던 판촉과 정기 할인 행사에 조금만 더 보태서 그럴싸한 행사 이름을 지었다는 게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 대한민국을 쇼핑해? 해외 직구 할란다

산자부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의 슬로건으로 '대한민국을 쇼핑하라'고 내걸었다.
그렇지만 막상 사려해도 특별히 살 게 없다는 게 함정이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라 하여 내가 바라던 제품이 저렴해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구매력이 높은 제품의 가격이 떨어진 것도 아니다. 철 지난 이월 상품과 인기 없는 품목들이 소비자의 눈 앞을 가릴 뿐이다.
아웃도어나 주방기구 등 패션 잡화 품목에 평소 관심이 많았던 소비자라면 이번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반가울수도 있겠지만, 스마트 가전처럼 구매 가치가 높은 제품을 바랐던 소비자들은 실망할 시즌이 되겠다. 주연 빠진 조연만으론 1년을 준비한 정부의 연출력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정부는 이 행사의 취지와 진행 방법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만든 걸까? 어차피 소비자 눈 밖에 난 제품은 저렴하게 팔아도 안 팔린다. 교묘하게 백화점의 가을 정기 세일 시즌에 맞춘 이 행사가 정부의 포장이라 오해받는 것도 어찌보면 예상 가능했던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을 쇼핑하고 싶지만 쇼핑할 게 없어서 문제다. 차라리 한 달을 더 기다려 미국을 쇼핑하고 오는 것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