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거래 파문으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HDD)가 디가우징(Degaussing)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법원행정처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PC의 HDD 원본을 핵심자료로 요청했지만, 해당 HDD가 디가우징으로
손상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검찰에 제출되지 않은 것이다.

가끔 오래된 PC를 버렸다가 그 안에 들어있는 HDD에서 사용자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거나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폐기한 PC에서 중요 보안
정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처럼 HDD 안의 데이터는 지워진 것처럼 보여도 남아있거나 복구되는 경우가 많은데, 디가우징 방식으로 지운
HDD는 왜 복구하지 못하는 걸까?
자기 현상을 이용한 HDD 기록 원리

HDD는 자기장을 이용해 데이터를 기록하는 자기 기록 장치의 일종이다. HDD 뿐만 아니라 카세트 테이프나 신용카드, 은행 통장 등도 자기
기록 방식을 사용하는데, 정보의 기록과 재생이 간편하고 비용이 적게 들며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도 한번 기록된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자석 옆에 코일을 놓아두면 전압이 발생하는 전자 유도 원리를 이용한 HDD는 금속 원판에 자성체로 얇은 막을 씌운 플래터를 일정한
구역을 나눠 전류가 흐르면 자기장이 발생하는 헤드로 개별 구역의 N극-S극 자화 방향을 바꿔 정보를 저장하거나 이렇게 저장된 정보를 읽어오게
된다.

HDD는 자기 테이프처럼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저장하지 않고 파일 이름, 위치 정보, 실제 데이터 영역으로 구분해 디스크 여기 저기에
저장하게 되는데, 여러 장의 플래터를 모터로 회전시키면서 헤드가 달린 암을 움직여 데이터를 읽거나 쓰게 된다.
이러한 물리적인 구조 때문에 HDD는 플래터의 크기와 숫자, 기록 밀도, 모터 회전 속도, 헤드 감도, 버퍼 메모리 등 여러가지 요소로
성능이 달라진다.
HDD 데이터 삭제? 그냥 지우면 흔적 남아

일반적으로 PC에서 데이터를 삭제하는 방법은 소프트웨어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키보드에서 삭제(Delete) 키를 누르거나 파일 또는 폴더를
직접 휴지통에 넣는다.
그러나 휴지통에 들어간 데이터는 완전히 사라진게 아니다. 예를 들어 HDD에 저장된 파일 정보를 집으로 치면 휴지통은 철거 전에 가림막을
쳐놓은 상태라 파일 이름과 위치 정보만 보이지 않게 하고 실제 데이터는 그대로 남아있으며, 가림막을 치워주는 작업을 한다면(휴지통 복원) 사라졌던
집이 도로 나타난다.

휴지통을 비웠거나 HDD를 포맷한다고 바로 집이 철거되는 것도 아니다. 매번 집을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 비효율적인 작업을 하기 싫은
운영체제(OS)는 휴지통에서 삭제되거나 포맷된 집을 철거하는 대신 등기부 등본만 지우는 식으로 파일 정보 테이블만 삭제하고 실제 데이터는 그대로
내버려뒀다가 새로운 데이터를 기록할 때 그대로 덮어씌운다.
따라서 전문적인 데이터 복구 도구를 사용하면 아직 남아있던 영역에서 지워지지 않은 데이터를 복원하거나 몇 번 이상 기록된 상태에서도 데이터
복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력한 자기장으로 플래터를 날리는 디가우징

HDD 데이터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영구 삭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소프트웨어적으로는 데이터 겹쳐쓰기나 로우 레벨 포맷처럼 데이터 주소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저장영역을 지우거나 새로 덮어씌워 기존에 저장된 정보를 삭제하는데, 이 경우 HDD 재사용이 가능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HDD가 정상적으로 동작해야 작업할 수 있다.

하드웨어적으로는 HDD를 고장내거나 부숴버리는 방법이 있다.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서 압수 수색 대상이 노트북 또는 PC에 달린 HDD를
밖으로 던져버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단순히 기판이나 내부 부품만 망가진 경우 데이터가 기록된 플래터만 따로 복구할 수 있으니 영구 삭제를
위해서는 전문 파쇄 장비를 써서 HDD 전체를 부숴야 한다.

(이미지 출처: data-terminator.com)
디가우징은 소프트웨어적으로 일일이 데이터를 지우거나 HDD를 직접 부수는 방법 대신 HDD 기록 원리를 이용해 기계에서 강력한 자기장으로
일정하게 정렬된 플래터의 자기장을 날려서 거기에 기록된 모든 데이터를 지워버린다.
물리적인 HDD 파쇄보다 빠르고 여러 번 실행할 수 있으며 디가우징이 끝난 HDD는 겉으로는 멀쩡해도 플래터 자기장 패턴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재사용이 불가능하다. 아예 물리적인 파쇄와 디가우징 방식을 결합해 HDD에 구멍을 뚫고 내부에 강력한 자기장을 쏘는 HDD
처리 장치도 있다.
스토리지 용량과 속도가 계속 발전하면서 기존 저장장치를 교체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 하면서 오래된 HDD는 그냥 버리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요한 데이터가 담겨있는 HDD를 다량으로 폐기해야 한다면 디가우저를 사용하는 것이 빠르고 편리하다.
다만 이러한 디가우저 장비는 개인이나 기관이 구입하기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전문 업체를 통해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