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D가 인텔의 제대로된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는 요즘 , 특정한 모델의 CPU를 구매하기로 했다면 이 제품을 선택하는 방법은 크게 다음의 4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인텔 정품, 병행수입 박스, 병행수입 벌크, 정품 벌크가 바로 이것이다.
필자 생각에는 인텔코리아의 최대 고민이 경쟁사인 AMD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병행수입을 어떻게 줄일것이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통상적으로 업계에서는 전체 인텔 CPU 매출의 30%가 병행수입(그레이) 제품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AMD의 점유율이 대략 5% 내외 이니 AMD 를 견제하는 것 보다 그레이 CPU를 어떻게 이 모든 병행수입 CPU가 정품으로 바뀌면 인텔코리아의 매출이 30%가 뛸 것이니 말이다.
먼저 그레이, 즉 병행수입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야겠다. 병행수입은 외국에서 적법하게 상표가 부착되어 유통되는 상품을 공식수입업자(국내 상표권자/사용권자)가 아닌 제3자가 허락없이 수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당연히 법적으로 가능하고 보호되는 권리이며, 오히려 정부는 일부 수입제품의 가격이 턱없이 비싼 행태를 막고자 병행수입을 적극 권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물론 필자도 당연히 병행수입을 권장하는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이는 병행수입으로 가장 득을보는 주체가 바로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같은 제품을 병행수입 업자를 통해 더욱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인텔 정품/병행수입 CPU, 어떻게 국내에서 유통되나?
현재 인텔코리아의 통제를 거쳐 유통 3사에서 수입하는 모든 CPU는 정품 박스 패키지로 수입된다. 물론, 이중에는 일부 예외가 있으며 삼성이나 LG와 같은 대기업의 PC에 OEM 공급하는 제품은 트레이 형태로 수입되며, 그외 대부분의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업체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정품 박스 패키지 형태의 CPU만 제공된다.
그러나 제조업체에 공급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이 되기도 한다. 예를들어 구매 제조업체가 쿨러없이 트레이 상태로 납품받기를 원하면, 수입업체에서 일일히 박스를 개봉해 트레이상태로 납품하고 쿨러가격을 약간 깎아서 판매하기도 한다. 제조업체 입장에선 어차피 조립하려면 CPU박스를 개봉해야하고 이로인해 발생하는 부산물을 처리해야 하는데 트레이상태에서 CPU만 받고 쿨러를 따로 받으면 조립 효율도 오르고 가격도 싸기 때문이다. 인텔의 CPU가 대부분의 제품이 같은 쿨러를 사용하고 있다보니 쿨러는 1000~2000원 정도에 대량으로 구매해 따로 보관해 사용한다.
병행수입 CPU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국내에 들어온다. 하나는 국외에서 판매되는 박스패키지를 그대로 수입하는 경우, 나머지 대부분은 해외 그레이 마켓에서 트레이상태로 판매되는 것을 들여오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쿨러는 수입하지 않고 CPU만 트레이 상태로 수입된다.
소비자가 직접 CPU박스를 구매하는 경우는 전체 CPU 매출의 약 10%도 되지 않고, 소비자가 박스를 구매할 경우에는 대부분 정품을 구입하는데다, 박스 병행수입은 단가가 국내 수입원에서 수입하는것과 크게 차이가 없어 많이 유통되지는 않지만, 그레이마켓에서 트레이상태로 수입되는 CPU는 수입단가 자체가 차이가 나는데다 조립업체 입장에서 박스 CPU보다 PC 조립/제조에 편하다는 이점때문에 수요가 많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같은 CPU라도 크게 4가지로 나뉘게 된다. 정품 박스, 정품 박스 상태에서 국내에서 직접 박스를 개봉해 트레이상태로 만든 정품 벌크, 그레이 CPU시장에서 트레이상태로 수입된 CPU에 정품 벌크 제조과정에서 누락된 쿨러나 별도로 수입한 쿨러를 같이 묶어 판매하는 병행수입 벌크, 병행수입 벌크 제품에 CPU박스 겉포장만 새로 만들어 박스상태로 만들거나 박스 그대로 수입된 병행수입 박스 이렇게 4가지이다.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 그레이 CPU
대부분의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데스크탑 PC 제조 사업에서 철수한 가운데, 그 공백은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조립 전문 중소기업들이 대부분 메우고 있다. PC수요는 개인이 자신이 쓸 목적으로 구매하는 것 보다 기업이나 기관에서 구매하는 수요가 훨씬 많다.
문제는 이런 조립업체 입장에서 그레이 CPU의 유혹은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정품 박스에 비해 트레이 제품은 라인 관리에 효율적이고 인건비 절약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정품도 요청하면 트레이 상태로 납품받을 수 있지만 수입업체에서 작업을 해야하기에 납품에 시일이 걸리고 결정적으로 박스와 가격차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병행수입 트레이 CPU는 라인에 투입하기도 좋은데다, 가격이 저렴하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방, 조립이 되어버린 PC에 사용된 CPU의 정품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정품과 병행수입의 차이가 정품 수입원에서 A/S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사실상 없는데다 CPU가 사용중 불량으로 인해 교환받을 상황의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설마 불량이 났다 하더라도 구매자가 직접 CPU만 정품 수입업체에 전화해 교체해달라고 할 확률이 거의 극미해 판매자가 병행수입 CPU 수입원에서 A/S를 못받더라도 자신이 A/S를 책임지면 소비자입장에선 사실 정품이나 병행수입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매자가 가정용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닌 단체나 기업이 물량으로 구입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이를 체크하진 않을 것이니까.
이러한 이유로 이미 많은 조립업체가 소비자가 정품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선에서 그레이 CPU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레이 CPU 비중이 높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미 PC가 조립이 되어 판매가 되어버리면 이 CPU가 정품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조립업체도 정품을 쓰기도 하고 병행수입을 쓰기도 하니 여기에 납품한것이 정품인지 병행수입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다, PC를 분해해 CPU의 코드를 대조하기 전까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혹여나 불량이 발생하면 그때 확인해서 정품이면 정품 A/S를 통해 A/S를 받아 넘겨주고 그레이면 그레이 수입업자에게 A/S를 받아 넘겨주면 된다. 혹 그레이 수입업자가 먹튀했다면 소비자에게 일단 새것을 구매해 A/S해주고 넘겨받은 불량은 인텔 RMA를 통해 A/S받으면 된다. 여기까지는 소비자나 PC제조사 모두 WIN-WIN하는 좋은 것처럼 보인다.
정품/그레이 CPU 가격차이, 누구의 배를 불리나?
정품과 그레이 CPU는 대략 많이 차이가 나면 약 1만원에서 적게 나면 3~4천원 정도의 차이가 있다. PC 1대만 구입하는 개인 소비자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아니지만 수백대 수천대의 PC를 납품하는 조립업체 관점에서는 1000대이면 벌써 5백만원의 원가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5000원 차이는 아주 큰 차이이다. 그 1000대 중에 CPU가 불량 날 확률은 거의 1개 미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주 매력적인 장사인 것이 확실하다.
문제는 정품과 그레이 CPU의 가격차이만큼 발생하는 '마진'을 누가 먹느냐이다. 필자는 당연히 소비자가 그 혜택을 오롯이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격비교사이트를 통해 CPU만 단품 구매할 경우에는 당연히 소비자가 그 차액만큼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병행수입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 수 없겠다. 어쨌든 소비자가 저렴하게 구매했고 그 혜택을 받았으면 더 좋다고도 할 수 있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대량으로 공급되고 납품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품과 그레이 CPU의 가격차이가 결국 누구의 배를 불리는가 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에도 구매자가 그 혜택을 받아야 하겠지만, 정품/그레이를 구매자가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대량으로 납품하고 구매하는 과정에 CPU가 일개 부품으로 다른 부품과 합쳐져 PC라는 완제품이 되어버리는 순간 이 마진은 당연히 조립업체가 고스란히 가져갈 확률이 크다.
소비자에게 돌아가야될 혜택이 소비자가 정품/그레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실질적으로 소비자에게 두 제품이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은근슬쩍 조립업체의 이윤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만약 이 과정에서 구매자에게 병행수입 제품을 사용한다고 통보를 했다면 구매자가 과연 이를 수긍했을 것인지, 수긍했더라도 이 가격차이가 고스란히 조립업체의 마진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C 구매할때는 병행수입 아니면 정품 CPU를 정확히 요구하고 확인하자
인텔이 한창 정품캠페인에 드라이브를 걸던 시절, 본지도 이 캠페인에 동참해 관련 기사를 여러번 보도한 바 있다. 그래서 노파심에 한가지 필자의 의견에 오해하지 말아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은 필자가 이 기사에서 정품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병행수입은 수입원가를 내리는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CPU는 불량이 날 확률이 거의 없고 본인의 조건에 병행수입이 더 맞다 판단된다면 이를 구입해서 비용을 아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소비자가 직접 CPU를 구매하여 조립을 하는 비율이 점점 떨어지고 조립업체를 통해 조립PC를 구매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구매자가 이 체크를 놓치는 순간 이를 이용해 누군가가 더 이득을 보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이다. 정확하게 병행수입 제품과 정품중에서 어떤 CPU를 사용하는지 확인하고 병행수입을 사용한다면 그에 맞는 원가가 제대로 책정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유명 PC 조립쇼핑몰이 PC구매시에 CPU 옵션으로 병행수입/정품 체크를 제공한다. 이를 정확하게 원하는 대로 체크했다면 정품이면 정품인증을 쇼핑몰에 요구할것을 추천하고 싶다. 아마 대부분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은, 설마 제대로 했겠지 그것마저 속였겠냐고 되물어보실수도 있겠다. 필자의 오지랖이 너무 넓은것 아니냐 하면서.
필자는 지난주, 한 지인이 유명한 어떤 쇼핑몰에서 PC를 구매했는데 분명히 정품 CPU를 주문했는데도 병행수입 제품이 장착되어 있는것을 확인했다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정품을 선택했다보니 같이 도착한 CPU 박스가 왔는데 마치 정품인 마냥 공식 3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홀로그램 스티커가 붙어있고 회사명까지 노출되어있는 병행수입 박스 제품이었다. (회사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이바닥에서 아시는 분들은 다 아는 그회사다)
이 지인은 쇼핑몰에 전화를 걸어 이회사 제품이 어떻게 정품인지 되물었고 기분이 나쁘니 환불을 요구했으나, 상담원은 끝까지 그회사 제품도 정품이 맞다며, 홀로그램 스티커와 정품박스를 그 근거로 들며 끝까지 환불을 거부했었다고 한다. 이에 필자가 공식 3사는 인텍, PCDIRECT, 코잇 뿐이며, 이회사는 정품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realcpu 홈페이지의 정품 링크를 보내주고 이를 근거로 결국엔 환불을 받았다.
눈뜨고도 코베이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지인 때문이다.